시중은행 근무 당시 처음 지점장 발령을 받고 발을 내디딘 곳이 군포지점이었다. 1천여 개의 크고 작은 공장들이 아침이면 지하철 역을 통해 엄청난 인파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런 공업단지에 부임했다.

거래처 인사하는 데만 꼬박 3개월이 걸린 그곳에서 전국 기업금융 3대 영업점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한번 실력을 발휘하고픈 마음으로 아침에 출근하면 정장과 넥타이 대신 점퍼와 트레킹화로 복장을 바꾼 후 영업을 하러 나섰다.

해당 거래기업의 산업별 추이와 업종별 특징을 파악하고 경영전략과 조직문화, 판로, 재고, 생산성, 홍보 관리 등등 논의하고 방향을 잡았으며 재무, 금융 외에도 그야말로 밀착 영업을 하면서 CEO뿐만 아니고 직원들과 같이 구내식당도 이용하고 야유회, 워크숍 동행 등 현장을 누볐었다.

기업금융 실적 제고 모범적 비즈니스 툴을 정착시키려고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실적 역시 가파르게 증가하며 직원들과 동반성장의 궤도를 탔다고 여겨질 때 본점 경영진의 짧은 영업 평가기준 변경이 통보됐다. 모든 영업전략을 개인금융 가계대출 위주로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의 이락 침공으로 바그다드가 불바다가 되는 아침 뉴스를 보고 출근한 바로 그날이었다.

전혀 교감이 안 된 일방적 발표에 전국 모든 지점장들이 전의를 잃고 어찌할 줄 모른 채 손을 놓고 있었다. "대한민국 은행 영업에서 기업거래처가 제출하는 재무제표는 국제표준화에 비춰 볼 때 더 이상 신뢰할 자료로 수용할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흔히 말해 "국제표준화(global standard)로 인정할 수 없다"라는 외국 사모펀드 경영진의 판단이었다.

공단 안에서의 기업금융은 은행 영업의 기본 중에서도 기본인데, 다짜고짜 그 기반을 흔든 경영전략이 국제표준화라는 이름으로 매몰된 것이다.

며칠 뒤 진행된 지점장 워크숍에서 대표로 선정돼 다음과 같은 말로 경영진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현지화를 약속했으면 존재감을 키워 가도록 도와 줘야지, 느닷없이 국제표준이라는 이름으로 평가기준을 바꿔 버리면 영업의 밑뿌리를 흔드는 것 아니냐? 대한민국 성장지도와 그 성장을 뒷받침한 자체 표준은 안 보이느냐?"

어차피 강자논리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사안이었다.

ESG 역시 마찬가지다. 강자논리로 국제라는 개념에서 출발해 대기업, 중견, 중소, 영세 이런 식으로 체인화시켜 먹이사슬 구축 같은 행태를 형성하며 외부 생태계를 생성·유지해 가는 일련의 사슬이다.

세계화를 앞세우며 국가 발전을 이룩해 왔지만 그 안에는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한 개념으로 핵심 가치를 구축했다. 그 가치는 기본이라는 이름으로 강자 편에서 기획·조정·운영되고, 이쪽에서는 기본인데 또 다른 한편에서는 무질서라는 보이지 않는 관리와 통제로 그야말로 ‘장(場)의 기본값’을 텍스트화시켜 제시한 것이다.

무질서를 정리하겠다고 어느 한 개념을 표준화라는 잣대로 들이대면 알게 모르게 다른 어느 형식논리를 따르게 되고 본래 가진 정체성이나 자존감은 무시되고 방치될 수 있다.

ESG의 국제표준화를 외치며 어느 카테고리에 묶어 두려는 무리한 대응은 기본에 대한 뿌리조차 무시하는 일이다. 수많은 산업생태계의 존재 본질과 특성을 교과서식 환경보호, 사회적 가치, 정도경영 기본값을 만들어 재단하겠다고 하면 다양성과 포용성은 포기하라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은행을 인수한 해외투자 사모펀드는 돈 놓고 돈 먹기식 카지노 논리로 투자한 것이다. 수익이 최우선이고 그 외 다른 것은 경영전략에 속하지 않는다. 배제와 무관심의 무서운 계절일 뿐이다.

가을이 점점 짙어가고 있다. 우리 기업들, CEO, 종사자 모두 어찌 보면 ESG라는 그물에 갇혀 정작 기본이 아닌 것을 기본으로 알고 시간과 비용, 인력을 낭비할지 걱정이 된다.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표준, 대기업이 요구하는 표준이 실질적 성장·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되고 기업경영 본질에 벗어나질 않는지 반드시 지켜봐야 한다. 가치가 포괄적으로 넓게 인정되고 사회적 합의가 선의로 인정된 기본은 내가 중심이 된 기본이어야지 남이 요구하는 기준에 무작정 맞출 수 없다.

ESG는 전략적 선택과 내부 설득, 외부 생태계 적응으로 기본의 진폭을 확장시켜 가야 한다. 국제회계기준(IFRS)보다 기업경영과 사회가치의 기본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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